"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in the nex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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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창조주를 망각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창조주를 잊어버린 인간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모략은 치밀하다 못해 처철하다. 심지어는 하나님조차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그것은 헛되고 헛된 짓들이다.
분명한 진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십자가는 인간의 계획과 노력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참된 구원은 분투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거저 받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행동들을 폐기시켜 버렸다.
그러다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인간이 얻을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던져버리고 십자를 붙잡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노력이다.
"인간의 가능성을 던져 버리는 만큼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하게 될 것이다."
-기도
계획하기보다는 우선 당신께 묻게하시며
모든 것을 통제하기를 원하기보다는 당신께 지배당함을 기쁨으로 알게 하소서
의지할 만한 것들을 모두 내 마음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게 하시며
오로지 의지할 만한 이는 당신 뿐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 그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 이제 나를 소유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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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삶을 활기있게 하는 생명력이란 무엇일까? 생명력이란 단지 생물학적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생명력은 살아있어하는 이유이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가에 대한 확신이 생명력이다. 그것은 꿈이며 비전과 같은 것이며 고난 가운데에서도 절망하거나 비탄에 빠지지 않고 가치 있는 삶을 누리게 한다.
나무라는 존재에게 시냇물은 생명 원천이고 나무는 그 물에 전적으로 의존되어야 한다.물이 나무를 존재하게 하며 나무의 존재목적인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을 받을 수 있다. 그가 그의 목적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력은 하나님께 깊이 심기어지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날마다 그를 묵상하고 말씀을 뵈옵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깊이 심겨지는 것이다. 매일 매일 그분 안에 깊이 심기어져 그 생명력을 공급받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늘 새로워진다면, 인생의 계절을 따라 고난과 역경이 오고 갈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목적을 위해 자라나고 열매를 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무가 될 것이다.
-기도-
오늘도 나는 당신의 품을 찾습니다.
주님의 깊은 마음에 심기워져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더욱 새롭게 하옵소서
새로운 비전을 주시고 새로운 꿈으로 나를 일으키시며,
비록 참을 수 없는 고난과 비탄에 내가 빠져 있을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않게 하시며 너무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나를 통해 주님의 목적들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소서.
그것을 꿈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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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가 제작한 특집다큐 <신의 길 인간의 길>이 한기총을 비롯한 보수 기독계의 거센 반발을 낳고 있다. 그 내용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지난 수십년 간 지속적으로 논쟁되어 왔던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것이었으며 역사적 예수의 연구내용과 관점을 공중파에 실어서 내보낸 것이 불과했다.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아니라 기독교계의 반응이다. 한기총의 비롯한 여러 뜻을 같이 하는 단체들이 반대집회나 농성 같은 실력행사로 방송을 저지하려고 했다. 몇 년 전 예수의 결혼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 “The Da Vinci Code”가 출판 되었을 때도 각 교계에서는 지나친 반응들을 보인 적이 있다. 과연 이 행동들이 복음에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을지는 의심스럽다.
교회의 과잉 반응은 어쩌면 교회 밖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곤 했었다. 의도하지 않는 홍보효과를 해준 경우가 있었다. 지난 1996년 10월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이 있었을 당시 기독교윤리운동실천본부 등 50여개 종교. 시민단체로 결성된 공대위가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 외화낭비 등을 이유로 공연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 반대운동은 오히려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관심까지 끌어들이는 반대현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공대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불공정한 내용을 케이블이 아니라 그것도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방영하였다는 사실은 2000년을 이어온 기독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는 검증되지 않은 자료 제시와 그 논리전개 방식의 문제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적되어 이미 학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허구 소설류인데, 이번에 SBS 스페셜이 전적으로 거기에만 의존하다시피 하면서 특집방송을 만든 것은 공익방송으로서 스스로 그 위상을 격하시킨 부끄러운 사건이며 동시에 정통 기독교에 대한 무책임한 폭거이다." -뉴스앤조이(소기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위의 글은 뉴스앤조이에 실린 SBS방송에 대한 반박기사이다.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독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범죄행위, 폭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교권과 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난 역사동안 교회는 엄청난 도전과 폭력을 당해왔다. 그리고 그 고난이 참혹하고 거셀 수 록 하나님의 복음은 더욱 전파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주도적인 종교 집단으로 더 이상 그 도전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 같다. 과거 처럼 그냥 힘없이 맞으면서 참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과 희생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집단의 힘을 보여주려는 능력종교(Power Religion)가 된 것은 아닐까?
예수가 결혼을 했다고 주장하던, 복음서가 고대신화들의 편집이라고 말하건 마음대로 떠들게 내버려두라. 우리는 때리면 맞고 비난하면 들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참 진리를 절대 뒤흔들 수 없다.
신성은 모독받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신성은 모독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진리를 고난과 희생으로 선포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그 임무에 충실 하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 어떠한 상황에도 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은 투쟁이 아니라 선포되는 것이다.”
<딤후 4:1-4>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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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1편의 저자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허물들을 받아들이고 자백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깨어지고 죄를 고백하는 마음이다. 에덴동산의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던 것 처럼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지고자 하며 완벽해지려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것을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마음과 생각 속에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척 하는 것이다. 그 완고하고 자만으로 가득한 마음 그 마음이 깨어져야 한다. 다윗에게는 다른 사람의 아내를 범한 참혹한 범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리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삶 가운데 자아의 문제들과 도덕적인 한계성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보여진 문제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가가 중요하다. 다윗이 그가 저지는 죄를 깨달알았을 때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 고통을 감내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깨어질 수 있었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져 하나님께 드려지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깨어지고 죄를 뉘우치는 마음은 인간 존재의 한계성과 불완전함에 대한 인정이며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굴복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바로 이 마음이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8:13-14)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잘 들어라.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 간 사람은 바로 그 세리였다.
- 시편 51편을 마치는 기도문
내 인생 최상의 것을 당신께 드리기 원합니다. 당신은 내가 커다란 일을 이루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저 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저의 마음입니다. 저의 마음을 산산히 부수어 주소서깨어진 나의 가슴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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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인도자의 가장 큰 유혹은 그가 인도하는 사람에게 완전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인도자의 오해이다. 사람들이 영적 인도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다. 오히려 솔직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자신이 겪어 왔고, 겪고 있는 갈등을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어떤 면에서 자신과 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 자신과 같은 인간적인 약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
성경에 나오는 영적 인도자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투명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내면의 아픔을 그대로 노출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5절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말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영적 거장인 바울이 자신의 내적인 갈등과 고통을 고백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고 기록했다. 바울의 인간적인 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은 절대로 자신을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인간으로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딤전 1:13)라고 말하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말한다. 또한 자신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고백하며,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한다(고전 15:8, 9).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전 11:30)고 말한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고백한다.
영적 인도자로서 바울의 탁월함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갈등의 해결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 로마서 7장에서 보여준 그의 내면의 갈등은 마지막 절에서 승리로 끝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그의 갈등이 예수님안에서 해결되었고, 예수님안에 승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로마서 8장 37절에서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선포한다.
영적 인도자의 자질은 완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솔직함에 있으며, 모든 문제의 해결을 자신안에서 찾지않고 예수님안에서 찾는데 있다. 사람들은 완벽한 영적 인도자를 찾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연약함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자신들의 영적인 갈등, 불안, 두려움, 고통과 어두움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우리는 영적 인도자의 완벽함속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의 연약함속에 소망을 갖는다. 그때 우리는 영적 인도자의 연약함을 극복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소망을 함께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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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긴 것 같지만 아주 짧다. 어제 유년의 뒷동산을 뛰어 놀았던 것 같은 데, 벌써 20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연세가 70, 80 되신 어르신들은 한결 같이 당신들이 살아오신 세월을 말씀하시기를 “순식간에 흘러왔어.” “눈 깜짝할 사이이지.” “인생은 금방이야.” 그러신다. 어느 시인은 인생을 하루로 표현했다. 하루의 짧은 삶이 곧 인생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 70, 80 사는 것과 하루살이 벌레가 하루를 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요, 결론적으로, 한 번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100년을 사는 것과 하루살이 풀벌레가 하루를 사는 것은 같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생도 하루살이 이다. 그래서 어떤 성현은 “사람은 어제를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단 하루를 삽니다. 사람은 아침을 살고 대낮을 살며 저녁을 살고 한밤을 삽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하루가 모여 1년 삽백육십오일, 그 1년의 하루가 모여 몇일 하는 식의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십 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우리 인생은 다만 하루를 살뿐이다. 오직 우리 인생은 어제를 그리며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에 쫓기며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루를 살뿐이다.
하루를 참되게 살다가 해가 진 뒤에 하루살이들은 겉옷을 벗고 하늘로 올라간다. 세상에 하루의 삶을 벗어나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하늘살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살뿐이다 하루에는 무엇 있는가? 그것은 순간만 일을 뿐이다. 찰라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순간이요, 찰라이다. 오랜 전통을 사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사는 것도 아니며, 장미빛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다. 또 지나 가버린 아침햇살을그리며 사는 것도 아니며, 또 저녁밥 지는 연기를 기다리며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이 찰라만을 살 뿐이다. 그래서 찰라는 사람을 깨어나게 하고, 찰라는 사람을 창조하며, 찰라는 사람을 사람되게 한다.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 우리는 찰라를 살아야지, 지루한 전통이나 희미한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삶의 한가운데에서 순간, 찰라를 사는 것이다. 이 찰라 속에는 영원이 담겨져 있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하루의 삶 속에 순간과 영원이 있듯이,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순간 속에 영원을 사신 주님 누가복음 8장 40절 이하에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와 주시기를 간청했다. 그의 열두 살 된 외동딸이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집으로 가려고 하니 군중이 그를 에워싸고 떠밀며 쫓아갔다. 그런데 그 군중 틈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가산마저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 병을 고쳐 주지 못하였다. 그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즉시, 그 순간에 출혈이 그쳤다. 이 여자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대 것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찰라에 피가 멎었다. 바로 순간 속에 구원이 있는 것이요, 영원이 있는 것이요, 찰라 속에 영생이 있는 것이다. 이 여자는 순간을 살았으며 영원을 누렸다. 여자가 손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지자, 예수께서 “누가 내 옷자락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선생님, 군중이 이렇게 선생님을 에워싸고 마구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여자는 찰라를 살아서 영원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그 많은 군중들은 바로 예수님이 옆에 있는데, 밀고 밀리며 예수님을 옷을 만지고, 닿았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런 느낌도 없으며, 아무런 변화도 없다.
마치 우리가 교회에 수없이 와도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오늘 그리스도인들이교회에는 들락 달락 거리며 수없이 많은 설교와 기도와 헌금생활을 하면서도 바로 군중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혈우병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은 순간을 살았지만, 영원을 맛보았다. 아주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찰라에 영원을 경험했다. 주님은 언제나 순간 속에 계신 분이다. 그 여자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대자 그 순간 기적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셨다. “누군가가 내 옷에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 그 수없이 많은 군중들의 손에 만져지고 찢겨져도 느껴지지 않던 주님께서 어찌 그 여자의 옷댐만을 느끼셨을까. 주님도 순간을 사시는 분이요. 찰라 속에서 영원을 사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떨면서 앞으로 나아가 엎드리며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이유며 병이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여인과 군중들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여인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군중들은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순간도 찰라도 없으며, 영원을 살수가 없다. 그 여인에게는 순간을 살 수 있는 마음, 찰라를 느낄 수 있는 진실 됨, 순간과 찰라를 살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영원을 사는 것 같지만, 하루를 사는 것이요,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하루 속에, 지금 이 순간 속에, 지금 내가 만나는 이 사람 속에, 내가 지금 바라보는 한 송이 꽃 속에, 지금 내가 느끼는 바람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러할 뿐 주님을 만날 때, 그 순간, 그 찰라는 하루의 삶 속에서 늘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순간 속에 영원을 맛보는 자이다. 열두 해 동안 혈우병을 앓은 이 여인처럼 예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피가 멎는 은총을 맛보며 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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